일본어로 말하다 막혀 본 적이 없는 게 문제예요

받아일 · 2026년 7월 31일 · 4분 읽기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담은 장면

회의는 넘겼는데 그다음 회식에서 조용해져요. 면접에서 첫 질문은 잘 넘겼는데 꼬리 질문에서 막히고요. 상황은 달라 보여도 무너지는 데는 같아요. 준비한 문장이 떨어진 다음이에요.

하나, 3초

회화에서 제일 당황스러운 순간은 어려운 단어를 만났을 때가 아니에요. 다음 문장이 안 떠오르는 3초예요.

침묵이 시작되면 상대가 기다려요. 2초쯤에 상대 표정이 살짝 바뀌어요. 3초가 넘으면 상대가 대신 문장을 끝내 주거나 화제를 거둬 가요. 그 순간 대화의 주도권이 넘어가고, 나는 그때부터 듣기만 하는 사람이 돼요. 한 번의 침묵이 그날 대화 전체의 자세를 정해 버리는 거예요.

재밌는 건 일본 사람들도 다음 문장이 바로바로 안 나온다는 거예요. 차이는 침묵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어요. 그들은 そうですね…, えっと 같은 말로 시간을 벌고 그 말 뒤에서 문장을 조립해요. 막히는 걸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막힌 티가 안 나게 하는 기술이에요.

둘, 면접의 꼬리 질문

일본계 기업 면접 준비의 정석처럼 통하는 방법이 있어요. 예상 질문 뽑고, 모범 답안 쓰고, 통째로 외우기. 저도 그렇게 준비해서 면접장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날 배운 걸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래요. 대본은 첫 질문까지만 내 편이에요.

自己紹介をお願いします에 준비한 답을 매끄럽게 말했어요. 면접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어요. “방금 그 프로젝트에서 제일 힘들었던 순간은요?” 대본에 없는 질문이었고, 직전까지 유창하던 사람이 갑자기 더듬기 시작하면 그게 오히려 더 크게 보여요.

면접관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당연해요. 준비된 답변은 그 사람이 얼마나 준비했는지를 말해 주지, 같이 일할 때 어떨지를 말해 주지 않아요. 그래서 꼬리 질문을 던져요. 심술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려는 거예요.

셋, 회의가 끝난 다음

직장인 일본어 공부는 대부분 회의를 겨냥해요. 업계 용어 외우고, 발표 문장 다듬고, 회의에서 쓸 문장 정리해 두고. 그런데 일본 파트너사와 몇 년을 콜로 일해 보니, 회의가 사실 일본어에서 제일 쉬운 구간이었어요.

회의에는 기댈 데가 많아요. 안건이 미리 공유돼 있고, 화면에 자료가 떠 있고, 숫자는 슬라이드가 말해 줘요. 내 발표 부분은 준비할 시간까지 있고요. 문장이 서툴러도 맥락이 받쳐 주니까 웬만하면 통해요. 전문 용어는 오히려 제일 만만한 부분이에요. 見積もり가 견적이고 納期가 납기라, 한자어끼리는 한국어와 절반쯤 겹치거든요.

진짜 시험은 자료가 없는 데서 시작돼요.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며 주말 얘기를 하는 회의 전 2분. 회의 끝나고 엘리베이터까지 같이 걷는 1분. 그리고 최종 보스, 다 같이 이자카야로 옮기는 자리. 이 자리에는 안건도 슬라이드도 없어요. 화제가 어디로 튈지 모르고, 준비한 문장이 나올 확률은 0에 가깝고, 침묵은 고스란히 내 몫이에요.

얄궂게도 관계는 그 자리에서 생겨요. 회의 발언은 회의록에 남지만, 상대가 나를 기억하는 건 엘리베이터에서 주고받은 농담이에요. 다음에 제가 메시지를 보냈을 때 답이 빨리 오는지 아닌지가 거기서 정해지더라고요.

셋 다 같은 과목이에요

세 경우 다 부족한 게 같아요. 연습해 온 종목과 실전 종목이 달라요. 문장을 미리 외워 두는 건 정해진 말을 꺼내는 능력인데, 실제로 필요한 건 예상 못 한 화제를 받아서 아무 말이나 이어 가는 능력이거든요.

그러면 그런 표현들을 외우면 되겠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몇 개 외워 뒀는데 실전에서 하나도 안 나왔어요. 이유는 단순해요. 막힌 순간에 “아 맞다, 시간 버는 표현이 있었지”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이미 막힘이거든요. 이건 지식이 아니라 반사예요. 반사는 외워서 안 생기고 실제로 막혀 본 횟수만큼 생겨요.

그래서 필요한 건 막혀도 되는 자리예요

회사 회의에서 막히면 대가가 크죠. 면접장은 더하고요. 거울 앞에서 혼자 말해 보는 것도 반쪽이에요. 아무도 되묻지 않으니까요.

필요한 건 사람이에요. 내 대답을 듣고 예상 못 한 각도로 되물어 오면서, 내가 아무리 막혀도 눈치를 안 주는 상대요. 매일 20분씩 그런 상대와 대화하면 막히고 빠져나오고 또 막히고를 수십 번 반복하게 돼요.

저는 그 반복을 전화 통화로 채웠어요. 오늘 한 일을 말하면 “왜 그렇게 했어요?”가 돌아오는 대화 자체가 운동이더라고요. 두어 달 지나니 침묵 대신 えっと가 먼저 나오는 입이 되어 있었어요. 외워서 된 게 아니라 하도 막혀 봐서 몸이 먼저 움직인 거예요.

막히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막혀 본 적이 없는 게 문제예요.

말이 길었네요
3분이면 아실 텐데

가입도 카드도 없이, 전화 한 통입니다.